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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명예를 지킨 스위스 용병

by goodmind.kr 2021. 12. 9.

 

중세 스위스는 알프스 산악지대에 위치해 무역이 어려웠고 땅은 척박했다.

가난한 젊은이들은 보수가 좋은 용병을 선호했는데 스위스 용병은 용맹했고 전장에서 죽는 것도 영예로 생각했다.​

1527년 교황 클레멘트 7세 때 신성로마제국의 샤를 5세는 교황청을 공격했다.

2만이 넘는 군사가 로마 성벽을 넘었고 교황청 외곽의 수비대가 뚫렸다.

신성로마 제국군의 약탈이 시작되었지만 189명의 스위스 근위병은 끝까지 남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 베드로 성당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적은 수의 용병이 2만의 병력을 막아내며 시간을 벌었고 클레멘트 7세는 간신히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스위스 근위대는 147명이 사망하였지만 그들은 유럽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금도 교황청의 근위대는 전원 스위스인들로 구성되어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스위스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 1792년에 다시 세계사에 등장한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베르사유 궁을 버리고 튈르리 궁으로 피신했다.

소총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의 스위스 근위대가 왕의 호위 맡고 있었다.

성난 시위대와 시민군 그리고 혁명에 가담한 정규군들이 튈르리 궁으로 몰려들었다.

겁에 질린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급히 궁에서 탈출하면서 스위스 근위대에게 불필요한 교전을 벌이지 말고 혁명군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스위스 근위대는 빈 궁을 떠나지 않았고 정문을 봉쇄한 채 시민군의 진입을 저지했다.

궁을 지키던 근위대 마저 도망쳤음에도 그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냈다.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앞세운 혁명군과의 전투가 벌여졌고 780명의 스위스 병사들이 장렬히 전사했다.​

스위스 용병의 용맹함을 익히 알고 있던 혁명군 대장이 말했다.​

성을 지키던 프랑스 군인들도 모두 도망쳐 버리고 아무도 없소.
이제 당신들에게 급료를 줄 사람도 없고, 이곳은 당신네 나라도 아니니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잠시 침묵하던 스위스 용병대장이 비장하게 뜻을 전했다.​

우리는 스위스 용병이오.
우리가 고용주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간다면 우리 후손들은 더 이상 용병으로 존재할 가치가 없어질 것이오.
이곳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신의이니 물러가지 않을 테면 어서 공격하시오.

 

빈사의 사자상 / 스위스 루체른

 

스위스 루체른에 가면 최후의 용병들을 기념하는 빈사의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자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문장과 스위스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부둥켜안고 있다.

부러진 창이 어깨에 박힌 채 죽어가고 있는 사자의 표정은 슬프나 근엄하다.​

 

스위스 용병들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명예와 신뢰를 얻었다.

그들이 보여준 철저한 신뢰는 지금까지 스위스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에 남아있다.

세계 최고의 국가 1위 (2018, 2019) 알프스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정치적 중립성 유지, 높은 1인당 국민소득, 낮은 실업률 등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부유한 국가로 꼽혔다.

스위스 용병의 믿음을 지키는 마인드가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냈고 그들의 희생은 후세의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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